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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미끄러졌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미끄럽네. 천천히. 한 걸음씩. 주머니에서 손 빼고. 한 걸음. 한 걸음. 아. 옆으로 걷는 게 낫겠다. 이렇게. 그래. 이게 훨씬 낫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의 다 왔다.

"조심해요. 미끄러워요." 해원씨가 말했다.

"네." 나는 돌 위에 올라섰다.

"금방 내려왔네요." 해원씨가 말했다.

"이게 지름길인가 봐요."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열었다. 세 시 사십팔 분이었다.

"몇 시예요?" 해원씨가 물었다.

"세 시 사십팔 분이요." 내가 대답했다.

"와. 그러면. 삼십 분만에 내려온 거네요? 우리 올라갈 때는 한 시간 반 걸렸잖아요. 엄청 빨리 내려왔네." 해원씨가 말했다.

"그러게요. 원래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내가 말했다.

"근데 여기 어디에요?" 해원씨가 물었다.

"글쎄요. 주택가인 거 같은데." 내가 말했다.

"철수씨도 몰라요?" 해원씨가 물었다.

"내려가서 봐야죠." 나는 눈 위로 내려섰다.

지붕. 담벼락. 골목. 아기자기하네. 여기 어디지? 이런 동네도 있었나?

"모르겠어요?" 해원씨가 물었다.

"응?" 내가 웃었다. "여기 어디지?"

"진짜 몰라요?" 해원씨가 물었다.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뭐예요. 여기서 이십 년 동안 살았다면서요." 해원씨가 웃었다.

"진짜 모르겠는데. 이런 동네도 있었나? 저도 처음 보는데요." 내가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해원씨가 두리번거렸다. "어느 쪽으로 가요?"

"설마 산 반대편으로 내려온 건 아니겠지." 내가 말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해원씨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아닐 거예요. 아까 위에서 내려올 때 시내가 왼쪽에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왼쪽으로 내려오는 게 맞죠."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맞나?"

"기다려 봐요." 해원씨가 휴대폰을 두드렸다.

"뭐 하려고요?" 내가 물었다.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보게요." 해원씨가 대답했다.

"그런 것도 나와요?" 내가 물었다.

"그럼요." 해원씨가 대답했다.

"좋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철수씨도 빨리 핸드폰 바꿔요." 해원씨가 말했다.

"핸드폰." 내가 말했다.

"네. 관심 없어요? 저거 한번 써보고 싶다. 뭐,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해원씨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네. 남자들은 이런 기계에 관심 많던데. 아. 그리고 철수씨는 공학 전공이잖아요." 해원씨가 말했다.

"그렇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관심이 없다." 해원씨가 말했다.

"네. 별로." 내가 말했다.

"특이해." 해원씨가 고개를 저었다.

"없을 수도 있죠." 내가 웃었다.

"나왔다. 잠깐만요. 음. 맞네요. 다행히 제대로 내려왔네요. 근데." 해원씨가 말했다.

"네." 내가 말했다.

"꽤 멀리 왔는데. 조금 걸어야 될 것 같아요." 해원씨가 말했다.

"아, 그래요? 그렇게 멀리 온 거 같지는 않은데." 내가 말했다.

"어. 이쪽이요." 해원씨가 팔을 뻗었다. "이쪽으로 가야 돼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해원씨가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해원씨를 따라 걸었다.

"이제부터 저만 따라와요. 알았죠." 해원씨가 나를 돌아보았다.

"알았어요." 내가 웃었다.

"하여튼." 해원씨가 눈을 흘겼다.

"아니." 나는 손을 흔들었다. "여기는 와 본 적이 없다니까요."

소설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