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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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배 한 척이 있었다. 길고 큰 검은색의 배였다. 나는 유조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배는 파도 위에서출렁거리고 있었다. 수 미터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위에 있던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세 파도에 따라 잡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리고 전부 물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을 밀치고 대피소 안으로뛰어들어갔다. 엷은 녹색의 물이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은 사람들을 벽으로 밀어붙였다가 밖으로끌어당겼다. 나는 창문의 쇠창살을 붙들고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물이 빠져나가자 사람들이 중국어로 고함을질러댔다. 그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국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에있는지, 또 어떻게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해변에 유조선이 떠있는 것도, 물이 녹색인 것도이상했다.

"이십삼 번. 이십삼 번 지원자 안 계세요?"

나는 직원이 외치는 소리에 의자에서 일어나 면접실을 향해 걸어갔다. 요즘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지 자꾸 이상한 꿈을 꾼다. 직원은 내가 걸어오는 것을 말 없이 지켜보다가 말했다.

"김철수씨?"

"네."

"삼십 초만 대기하겠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직원은 내게 준비 되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했다. 근데 내가 준비가 안 되었다면 기다려주겠다는 건가? 그는 문을 열어주며 나에게 미소 지었다.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잘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면접실 내부의 모습은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면접관들은 긴 회의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거기서 삼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지원자가 앉는 의자가 있었다. 나는 면접관이 세 명인 것만 확인하고 시선을 내린 후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어서오세요. 앉으세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철수라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의자에 앉았다. 가운데의 면접관은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젊었다. 삼십 대 후반, 많아도 사십 대 초반인 것 같았다. 왼쪽의 면접관이 먼저 입을 열어 내게 밥을 먹었는지 물었다. 그는 내게 아침 일찍 오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그럼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그는 웃으며 앉아서 해도 된다고 했다. 그 때 가운데의 면접관이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냥 바로 시작하죠. 시간이 없어서."

이번에는 오른쪽의 면접관이 서류들을 넘기며 나의 주의를 끌었다.

"휴학을 이 년 동안이나 하셨네요? "이 년 동안 뭐 하셨어요? 여기에는 안 나와 있는데."

"소설을...썼습니다."

"철수씨 전공이 공학 아니었나요? 근데 소설을 쓰셨다고요?"

가운데의 면접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 뭐 쓸 수야 있지. 쓸 수는 있는데."

왼쪽의 면접관은 내게 재주가 많다고 말했지만 칭찬으로 들리진 않았다.

"원래 그쪽에 관심이 있었나 봐요? 문학 쪽으로."

"아. 아니요. 문학 쪽으로는 전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소설도 거의 안 읽습니다. 그냥 쓰는 것만좋아합니다."

"취미 같은 거예요? 소설 쓰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때 딱 한 번 뿐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은 왜 안 해요?"

왼쪽의 면접관은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이제는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웃자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둘도 따라 웃었다. 나는 매번 면접에 실패해도 면접관을 즐겁게 하는 일에는 늘 성공했다.

"그럼 아예 전공을 그쪽으로 선택하지 그랬어요. 글 쓰는 걸 좋아했으면."

"고등학교 때는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수학하고 물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공대로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학교 일 학년 때 글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날 나는 학생들 앞에서 시를 암송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를 찾아서 다른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과제였다.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선택했고 이는 과제의 취지와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교수님은 암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를 나무랐다.

"김철수 씨. 우리가 다 알 만한 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나는 그 시가 좋았다.

"그래서 어땠나요?" 교수님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차례의 학생을 찾는 것 같았다.

"그냥...시 같았는데요."

"시 같았다." 교수님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글쓰기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철수씨?" 가운데의 면접관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이 년 동안 소설만 썼어요? 그거 말고 다른 건 안했어요? 그 사이에 외국에서 연수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여기 보니까 영어 점수가 상당히 높으시네요."

소설만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근데 굳이 휴학까지 하면서 그걸 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원래는 방학 때만 잠깐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년씩이나 휴학을 했어요?"

"쓰는 게 생각처럼 잘 안 됐습니다."

"취업 준비는요? 보통 그 시기에는 다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잖아요."

사 학년 때는 수업이 많지 않아서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어땠어요? 시간이 충분하던가요? 지금 본인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이 년 동안 더 많은 걸 준비할 수도 있었잖아요. 예를 들어, 인턴을 한다든지. 아니면 외국어를 하나더 배운다든지. 혹시 필요한 자격증이 있다면 그걸 위한 공부를 할 수도 있고요."

맞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죠."

"네. 그때는 제가 잘 몰랐습니다. 취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철수씨. 오해하지 마세요. 철수씨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철수씨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이해하려는 것뿐이에요."

부디 이해하셨기를.

"철수씨.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본인이 얻은 게 있다면 뭘까요?"

"끈기를 기를 수 있었던 같습니다."

거짓말.

"그리고요?"

"이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지랄.

소설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