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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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더블레스 백작은 아니에스 공작가가 몰락한 이후에 새로운 남부의 맹주로 떠올랐다. 만약 정말 더블레스 백작이 악마숭배자들과 한편이라면, 그를 가까이 하고 있는 1왕자는 과연 아무 관련도 없을까?

1왕자를 향한 루이센의 감정은 그럭저럭 호감이었다. 왕자 시절에는 거북해하기도 했지만, 왕이 된 이후 무너져 가는 왕국을 건사하겠다고 노력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이랑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왕국을 유지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고 완전히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리슨의 일로 마냥 과거의 기억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1왕자가 직접적으로 악마숭배자와 관련이 없더라도, 심복인 더블레스 백작이 루이센을 적대시한다면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까지 오는 여정에서 루이센과 칼튼은 많은 대화를 했다. 그중에 1왕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두 사람은 1왕자가 굉장히 정치적인 계산에 능숙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면모도 강한 사람이라는 데 동의했다.

결국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백 퍼센트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칼튼이 왕성으로 가 직접 그를 만나 봐야 하는 이유기도 했다.

“음, 그래. 사실 엄청 그렇게 막 희망찬 건 아니야.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 남아 있지. 내가 허세를 좀 부려 봤어. 그래도 선물은 다 받도록 해. 자네에게 뭐라도 주고 싶단 말이야.”

루이센은 일부러 시무룩한 척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칼튼의 마음도 약해졌다.

“그럼 적어도 담아 갈 포댓자루라도 하나 주시죠. 제 꼴, 공작님이 보시기에도 웃기지 않아요?”

“음.”

바지고 상의고 주머니는 터질 듯 불룩했고, 허리에는 검이랑 단검이 매달려 있고, 목에는 큼직한 보석 알이 박힌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려 있으니 우연히 보물창고를 털게 된 좀도둑 같았다.

“내가 과했네.”

루이센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언제 칼튼의 이런 웃긴 모습을 또 보겠는가. 그러자 칼튼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왜?”

너무 놀렸나? 루이센이 쭈그러들기 전에 칼튼이 말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응?”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칼튼의 말을 허투루 들을 것은 아니라, 두 사람은 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층에 있던 덕분에 저택의 부지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 아마도 저택의 입구쯤으로 추정되는 부근에, 깃발 하나가 나부꼈다. 옅은 파란색 배경에 암사자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이었다.

“저거 왕실 기사단의 깃발 아닌가요?”

“맞아…….”

왕실 기사단은 국왕의 직속 기사단으로 오로지 국왕의 명령만 따르는 친위부대였다. 그들이 지금 루이센의 허락도 없이 아니에스 공작가의 저택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평범한 방문이라면 당연히 문 앞에서 기다리며 저택 방문에 대해 루이센의 허락을 받았을 테니, 그냥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칼튼이 당장 루이센을 안아 들고 도망칠 기세로 물었다. 루이센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도망칠 곳도 없어.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자고.”

또 수도 저택의 사람들을 두고 도망치는 건 못 할 짓인 데다, 남부 대영주이자 공작인 자신을 함부로 해칠 리는 없다는 계산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싸움을 준비하겠습니다.”

칼튼은 급히 목걸이니, 뭐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어 던지고, 날이 잘 선 단검 하나만 손에 쥐었다. 1왕자가 보냈을 기사단과 싸우겠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하는 칼튼을 보자니 루이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루이센은 충동적으로 칼튼의 팔을 잡아당겼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의 입술은 짧게 떨어졌지만, 시선은 오래도록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13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