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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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센은 명령하지 않았다. 도망치자는 루거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고, 지금 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니까 루거가 옆에서 말하는 대로 어버버 끌려간 것이다. 멍청하고 수동적인, 실로 회귀 전 자신이 할 법한 짓이었다.

처음에 칼튼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고 나에게 속살거린 게 누구였지? 루거였다. 칼튼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전하며 루이센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 역시도 루거였다.

당시의 루이센은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위기에 몹시 겁에 질려있었다. 상황에 압도되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수동적이라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던 루이센이었다.

과연 루거가 없었다면 루이센은 스스로 영지에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으로 루이센은 의문이 들었다. 야반도주를 선택한 건 자신이지만, 정말 그게 완전히 자신의 의지였다고 볼 수 있을까?

빠르게 휘몰아치는 생각 끝에 루이센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루이센은 루거를 시종으로서 신뢰했다. 그렇기에 루거가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루이센을 죽이고, 납치할 수 있었다. 왜 루이센이 스스로 영지를 떠나게 만든 거지?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갑자기 루거를 고용할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대략 오 년 전쯤. 당시에 루이센에게는 총관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은 수석 시종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차 사고가 일어나 수석 시종이 다치면서 급히 주변의 인맥으로 일시적으로 시중을 들 시종을 구했다.

어디까지나 임시직이었고 루이센 혼자 수도에 머물던 때라, 루이센이 대충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용했다. 그게 루거였다.

루거는 루이센의 입안의 혀처럼 굴었고 많은 즐거운 놀이를 가르쳤다. 어느 틈인가 원래 수석 시종의 복귀가 유야무야되고 루거는 계속 자신의 곁에 남았다.

루이센의 주변에는 고용인들이 아주 많았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나타났다가 떠나갔다. 루이센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했기에 원래 수석 시종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루거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시종은 재밌는 녀석이구나 정도였다. 만약 회귀 전에 야반도주 사건과 루거가 자신을 대신해 죽지 않았다면 루이센은 루거를 잊었을 것이다.

‘잠깐만. 그럼 회귀 전에 루거가 날 위해서 죽은 건 뭐야. 진짜 죽은 거 맞아?’

세상에 어떤 스파이가 먹잇감을 위해 죽겠는가.

‘그럼 뭐야. 그때 죽은 것도 거짓말이야?’

뒷골이 찡하게 땅겨 왔다.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믿었던 루거가, 사실은 스파이에 의도적으로 접근해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그 치밀함이 무섭기까지 했다.

“네 뒤에 있는 놈은 누구야? 뭘 바라고 이런 짓을 사주한 거지?”

회귀 전, 루이센은 루거의 수작에 넘어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네 뒤에 있는 그자는 내 죽음이 아니라 몰락을 바라는 건가?”

루이센의 말에 루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공작님을 배신했는데, 궁금한 게 고작 그거에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왜 공작님을 배신했는지 그런 거요.”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해?”

“정말……. 공작님다운 말이네요. 전 공작님 그런 오만한 점, 좋아해요. 대귀족이라면 그래야죠.”

이상하게도 루이센의 귀에는 루거가 감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평소에 루거가 자주 하던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들으려니 기분만 더러웠다.

“자, 이제 수다는 그만 떨죠.”

루거는 질긴 가죽끈을 꺼내어 루이센의 손과 발을 묶었다.

루이센은 반항해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오랜 방랑으로 다져진 멘탈은 당장 받은 충격을 미루고 생존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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