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By day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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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은 엇갈린 사랑이 온다! 25살 21세기 여성 고하진은 달이 태양를 가리는 개기일식 날, 뜻밖의 사고를 통해 천년 전 고려로 영혼이 타임슬립하게 된다. 하진의 영혼이 들어가게... More

1. 고려시대의 21세기 소녀, 상처받은 '개늑대' 황자
2. 달이 맺어준 운명같은 인연의 시작
3. 피비린내 나는 나례의 밤
4. 하늘 아래 하나뿐인 내 것
6. 슬픈 이별, 후회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7. 새로운 세상으로 내딛는 한 걸음
8. 험난한 황궁, 예기치 못한 사건
9. 홀로 한탄하고 모습을 드러낸 지기
Sherry의 알림
10. 꽃등은 꺼지고 시야를 가리는 공포 - 1

5. 그토록 바랬던 황궁살이와 깊어저만 가는 인연,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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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046

왕소

내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묘하게 바뀌었다. 연화는 다시 해수를 바라보았고 당사자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연화의 팔을 내렸다.

"그 머리꽂이의 원래 주인은 나니까 저 아이를 어쩔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오라버니-"

연화를 향한 내 입은 여전히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눈빛의 온기는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수가 훔친게 아닙니다!"

연화의 앙칼진 말을 끊으며 은이가 뛰어올라와 해수 앞에 섰다. 하지만 이내 뭐라 말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넷째 형님 방앞에서 주웠다고... 아니... 줍는걸 제가 봤습니다."

은이의 말에 연화는 탄식을 내뱉었다.

"하, 은이 너까지."

"아가씨 내려. 어서!"

욱이가 고함치자 여종 하나가 와서 수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채령 곁에 가서 서로를 부축했다. 그리고 연화에게 마지막 눈길을 준 후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엔 연화 니 생각이 짧았다."

욱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요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화, 니가 잘한거다. 저런 것들은 혼쭐을 내줘야지. 분위기하곤. 난 가봐야겠다."

"저도 그럼 이만."

원이도 요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떴고 정이도 수를 부르는 은이를 끌고 나갔다. 곧 백아도 내 눈치를 살피며 떠났고 이내 연화와 나만 남았다.

다른 황자들의 목소리가 잦아지자 나는 그녀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머리꽂이를 내미는 연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 가여우셨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저 머리꽂이를 가져갔다. 잘게 흔들리는 연화의 목소리가 이어갔다.

"제가 아는 오라버닌 이리 절 막을 분이 아니십니다. 설마, 저 아이에게 마음이라도 두신 겁니까?"

"연화... 니 체면을 구겼다면 미안하다."

나는 분노로 바르르 떨리는 연화에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남긴 채 뒷모습을 보였다.

***

-저 아이에게 마음이라도 두신 겁니까?

하, 난 그런 것 모른다. 받아본 마음이 있어야 무엇인지도 알지.

머리꽂이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중에 앞에 서 있는 욱이가 눈에 띄었다. 나는 뒷짐을 진 채 그가 뭐라 말하기를 기다렸다.

"네 것이라 하더구나."

욱의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잘못 아는 듯 싶어 알려주려 왔다. 이곳에 니 것이라곤 없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했는데...

"연화도. 해수도. 다 내 사람이야. 다시는 내 동생과 내 처아우를 함부로 대하지마라."

욱이가 날 스쳐지나가며 느껴지는 바람이 그리도 매서울 수는 없었다. 혹여나 욱이는 다를 줄 알았는데... 방금 그가 했던 말, 내 동생과 내 처아우를 함부로 대하지마라. 이 집에 있는 동안 숨죽이고 살라는 뜻. 그리고 난 네가 그나마 좀 다른 줄로만 알았다. 아님, 순전히 이게 해수이기 때문인가?

♤♡☆♧

해수의 별채

해수

맞은지 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채령이에 비해 별로 맞지도 않았지만 아까전 회초리가 파고든 등짝이 쓰라려 잠을 청하지 못하였다. 또 사람을 짐승처럼 매달고 때렸었다. 피가 나게까지. 몸도 아팠지만... 오늘 황자님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내 것이다.

내 것. 내 것이라 부르셨다, 나를. 처음부터 날 구해주시는 것도 충분히 4황자님 답지 않은 행동이었건만 내 것? 마음을 뒤흔드는 기억 때문에 또 잘 수가 없었다.

"수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8황자님 뵈기가 어색해 나는 코를 훔치곤 눈을 감았다.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혹 깨어 있거든, 약을 앞에 둘테니 잊지말고 바르거라."

나는 무심결에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선명히 드러나있었다.

"그리고... 낮에 일은 전부 잊었음싶다."

날 걱정해주시는 그의 마음에 나는 눈물이 차올랐다. 문뜩 그에게 답하지 않은게 죄스러워 나는 문을 열고 별채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대답이라도 할 걸. 날 생각해주셨는데...

미안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섰더니 그가 내 눈 앞에 서 계셨다.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온화한 표정을 띄며 날 보았다. 황자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하얀 함을 하나 내밀었다. 약이었다. 하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받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의 진짜 마음을 몰라서. 내 진짜 마음을 몰라서.

내가 망설이자 황자님은 약을 직접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뵙기 창피해서 자는 척을..."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그저 살짝 웃더니 말했다.

"그런 줄 안다. 아직 많이 아프지?"

난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저었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그런 취급 당한게 더 속상합니다. 여긴... 여긴 원래 그런 곳이에요? 누구 딸, 누구 아들 아니면 존중받지 못하는 그런 곳이냐구요. 아니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짐승처럼 매달고 때리고. 고려는... 원래 이런가요?"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했다. 이 모든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게 누구든.

황자님은 내게 다가오시더니 머뭇거리며 내 어깨에 손을 얹졌다.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허나 내 약조하마. 앞으론 그 누구도 널 그리 대하지 못한 것이야. 날 믿어라."

황자님. 정말 끝까지 날 위해주신다. 이때동안 내 마음이 무엇이였는지 몰랐고 아직도 확연치는 않지만 그가... 좋아.

또 이런다. 부인을 생각해. 니가 곁을 주는 건, 부인에게 상처주는 거라고.

나는 어깨를 움직여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린 후 내 방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손에 흰 약통을 꼭 쥐고서...

***

해씨 부인의 방

"몸은 좀 어떠하니?"

이튿날, 언니가 날 불러서 다짜고짜 한 말은 이것이였다.

"전 괜찮아요. 황자님께서 주신 약 덕분에 아픈 줄도 모르겠습니다."

언니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밝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계속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았다.

"명이 언니, 전 진짜 괜찮아요."

"미안하다. 끝까지 널 위해주고 싶은데 그런 일도 막아주지 못하고... 네가 더 조신하렴. 내 형편이 이렇지만 않았어라도 너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부덕한 탓이다. 미안하다."

또, 언니는 자기 때문이 아닌데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런 그녀의 어두운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몸을 발딱 세우곤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몸으로 산책 좀 다녀올게요. 언니도 어젯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몸조리 잘해요."

***

호수

언닐 향한 걱정과 슬픔, 8황자님을 향한 심란함, 4황자님을 향한 정체 모를 기분, 그리고 연화 공주를 향한 치가 떨리는 분노가 서로 사이좋게 내 머릿속을 해집었다.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마음을 달래며 나는 돌다리 위를 왔다갔다 했다. 그때 툭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무언가에 부딪혀 오는 것에 나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시큰둥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4황자님의 모습이 내 시야에 담겨오자 나는 더욱 아픈 척을 했다.

"아야야야야야."

"니가 와서 부딪힌 거야."

그는 그런 내가 함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불평을 쏟아부었다.

"내 것이오? 남들이 오해하기 딱 좋은 그런 말은 대체 뭐랍니까?"

"넌 고맙다는 말은 할 줄 모르냐? 맞아 죽을 뻔한 걸 살려줬더니, 쯧. 따지고 들기 전에 '구해줘서 감사합니다'란 말이 먼저 나와야지."

그건 또 맞는 말인지라.

"맨날 죽일 듯이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나 궁금하긴 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까딱 숙여 말했다. 시선을 피하는 날 보며 그는 작게 웃음을 띠고는 말했다.

"그 머리꽂이가 왜 니 손에 있는 건데? 어디서 났어?"

"황궁 욕탕에서 흘리셨잖아요. 이게 다 황자님 얼굴 봤단 말 안 할려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러자 나는 황급히 말을 마쳤다.

"그래서 얼굴 봤단 얘기는 안 했어요. 약속 지켰다니까요."

그제야 안도한 듯 숨을 작게 뱉은 그는 입꼬리를 올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내가 무섭지도 않냐? 따박따박 말대꾸를 계속 해."

"상대하기 만만한 분은 아니어도 이제 무섭지는 않습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그는 고개를 기울여 나를 쳐다봤다. 그런 그에게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절 내 것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건 왜?"

"아니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데, 니꺼 내꺼가 뭡니까?"

"허면..."

내 당당한 말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한발짝 다가가 내 얼굴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반사적으로 나는 몸을 뒤로 기울여 조금 물러섰다. 그는 날 계속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을 때었다.

"내 사람이라 부를까?"

헐, 이건 또 뭐람?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휙 저었다.

"아, 그것도 아니죠. 서로간에 부담스런 호칭은 않하니만 못합니다. 다른 걸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고개를 짧게 숙이곤 그를 스쳐 지나갔다.

***

약재

"맛있겠다, 그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채령이와 약재방을 들려 떡을 두 꾸러미 정도 샀다. 약재방을 나와서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놔라!"

"어?"

채령이가 먼저 눈치채고 그쪽을 바라보자 나도 시선을 따라갔다.

"내가 누군줄 알고! 내가 바로 열넷째-"

어떤 깡패 같은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이는 다름아닌 14황자님, 왕정이었다.

"어머, 저 사람 열넷째 황자 아니야?"

"맞습니다. 야!"

14황자님이 몽둥이로 맞자 채령이 소리지르려는 것을 내가 손으로 막았다. 여기서 우리끼리 뭔가를 하는 건 너무 위험해.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채령이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넌 어서 사람들을 불러와."

"아가씬요?"

"어차피 우리 힘만으론 안돼. 난 뒤를 쫓아갈 테니까, 넌 가서 도움을 청해. 빨리!"

그리고 나는 서둘러 그들을 쫓아갔다.

♤♡☆♧

왕소

"어?"

해수와 헤어진 뒤, 말을 타고 시장 주변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붉은 치마를 꼭 쥐고 내 앞을 뛰어갔다. 그녀는 날 보지 못했는지 멈추지도 않고 앞만 보며 달려갔다.

"아니..."

왜 저러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

대나무 숲

해수

그 깡패같은 놈들을 쫓아 이 대나무 숲까지 오게 되었다. 얼마전 이 대숲에서 살수들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기억이 되살아나며 내게 한기를 남겼다.

나쁜 놈들은 꼭 여기로 와야 해?

"이거 놔! 이거 놔!"

그 사람들은 14황자님의 양팔을 붙잡은 채 그의 무릎을 꿇렸다. 대장인 듯 보이는 보랏빛 옷을 입은 남자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니들 목숨이 아깝지 않아?!"

"황자님이야말로, 제 팔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곤."

자세히 보니 저 보랏빛 옷의 남자의 오른팔이 없었다. 그는 웃음을 띠고는 말을 이었다.

"너무하십니다."

"난 그런 적 없다!"

"그렇죠. 황자님이야 저와 싸우다 진 것뿐. 절 이리 만드신 건 충주원 황후님이시니까요."

"그건... 난 전혀 몰랐다."

"도로..."

그의 부하 중 한명이 보랏빛 옷 남자에게 도끼를 하나 건넸다. 날카로운 도끼의 끝이 황자님을 향해 반짝였다. 어떡하지? 아, 어떡해.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보랏빛 옷 남자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오른쪽 소매를 도끼로 어루만졌다.

"이거 놔라. 놓지 못해?! 거 누구 없느냐?!"

보랏빛 옷 남자는 그의 오른팔에 도끼를 갇다댔다. 나는 겁에 질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도끼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받으십시오!"

그때 땅바닥에 있던 긴 나무 작대기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고선 어무런 생각없이 달려들었다.

"이아아아아아!"

왠 계집 하나가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모두들 놀라 물러섰다. 14황자님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아련히 비쳤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건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계속 작대기를 휘두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다 비켜! 다 비켜! 이것들이, 다 비켜! 으이씨 이것들이 다 비켜!"

그 와중, 황자님은 양팔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떨처내고는 입을 벌린채 나를 쳐다보았다.

"확 창자를 뽑아서 순대국을 끓여 볼라. 어?! 눈 깔아! 가까이 오면 뒤져!"

그런데 아무리 내가 용기있게 달려들었다해도 힘이 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곧 그들을 나와 황자님을 에워쌌고 내 작대기를 쳐서 떨어뜨려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물밀듯이 다가와서 나를 가득 체웠다. 나는 황자님의 팔을 꼭 쥐고 말했다.

"괜찮은 거죠?"

"너까지 끼어들게해 미안하다."

"일단... 튀어요."

"튀, 뭐?"

나는 그를 밀며 다급히 말했다.

"아, 그냥 달아나자구!"

"이대로 갈 순 없다! 내 이 저것들을 그냥-"

"미쳤어요? 빨리 가요, 그냥 좀-"

그때 그가 내 앞으로 돌진하면서 몽둥이에 세게 맞았다.

"황자님!"

우리를 에워싼 사람들은 인정사정 없이 그에게 매질을 가했고 그는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 아무 것도 못하는 나를 감싸안았다. 그 덕에 모든 매질은 다 그가 맞고 있었다.

우리는 땅으로 엎어졌고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굳은 의지로 가득찬 목소리를 내었다.

"걱정마라. 내가 꼭 구해주마."

"아하, 누가 누굴 구해?"

어차피 벌써 저 아니면 팔도 짤렸을텐데 어떻게 지금 나를 구하니 뭐니를 말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더 많은 폭력이 가해졌고 그것 또한 계속 그의 등짝에만 퍼부어질뿐 날 건드리진 않았다. 아 황자님, 진짜 이걸 어떡해?

그때였다.

"멈춰라!"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8황자님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았다.

황자님은 말에서 내리시더니 곧바로 달려드는 도끼를 눈 한번 깜박이시지 않으시고 피하셨다. 그리고 두번째로 다가오는 사람도 단숨에 제압해 버리셨다. 뒤에선 한 사람이 도끼로 그를 내리찍으려다 그가 눈길을 주자 멈칫거렸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직접 있지 않고 현대의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이걸 보고 있었다면 그는 일명 내 친구들이 말하는 '심쿵남'이었다.

"형님."

"다친 덴?"

"참을 만 합니다."

14황자님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는 날 보았다.

"넌?"

황자님께서 와주셨다는 걸로만이 너무 기뻐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쳐라!"

대장의 목소리에 그의 부하들은 일제이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8황자님은 우리를 밀치고는 혼자서 대다수를 상대하셨다. 처음에는 휘리릭 날아다니면서 잘 싸우셨지만 시간이 가면서 딸리기 시작했다. 부하들 중 한명이 몽둥이로 그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고 다른 이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서 맞서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낫을 피하시고는 몸을 일으켜 모두 다 남김없이 해치웠다. 하지만 부하들이 다 쓰러졌는데도 보랏빛 옷의 남자는 그저 헛웃음만 지을 뿐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란 말을 모르시는지."

아마도 아직 완전히 살지는 못하였나 보네.

대숲 곳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둘러쌌다. 상당히 많은 수였다. 아무리 무술에 능하셔도 8황자님 혼자만으론 상대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나는 두려움에 14황자님의 품을 꼭 끌어안았다.

"그 말이 맞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4황자님은 검은 그림자처럼 푸른 대숲 사이를 지나왔다.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에워싼 사람들의 공포도 커졌다. 나는 반가움에 미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늑대... 늑대개다."

"방심은 금물인데..."

그의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덩달아 커졌다.

"늑대개다. 늑대개야."

"어떡하지?"

"도망가야하는 거 아냐?"

4황자님은 우리 앞에 서서 웃음을 띠고는 말을 이었다.

"날 보고도 달아나질 않는다. 베짱이 좋은 게냐? 아님... 정녕 죽고 싶은 게냐?"

그의 목소리는 그가 뽑아든 칼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왔다. 사람들은 곧 서로서로 앞다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대장을 보며 황자님은 고개를 까딱이셨다. 그러자 그도 마지못해 도끼를 내던지고는 도망가버렸다.

이제 진짜 살았다. 저 사람, 대단한데? 사람들에게 저렇게 무서운 존재인가?

그는 칼집에 다시 칼을 꽂고는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그와 내 눈이 마주치자 나는 더욱 활짝 웃어보였다.

"상한 덴?"

4황자님의 물음에 14황자님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 아까 8황자님이 똑같이 물으셨을 땐 참을 만 하다고 하더니 이젠 아에 없어?

"소가 와준 게 다행이었다."

"형님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8황자님의 말에 14황자님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인사는 결코 4황자님을 향한 게 아니었다. 동복 형제라 들었는데, 왜 이러지?

그는 날 보며 말을 이었다.

"아, 니 덕에 팔을 건졌으니 내 기억할게. 이제 니 목숨은 내 목숨과 같다. 내가 죽더라도 넌 꼭 구할 거야."

그의 말이 너무 어른스럽고 대견해 보여 방금 전까지 궁금했던 것이 싹 다 사라졌다. 아직 나보다도 어린데... 나는 예전에 내 동생에게 했듯이 그를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어이구. 어이구, 우리 막내 황자님. 벌써부터 이렇게 든든하니 곧 멋진 남자가 되시겠-"

헉, 잠깐만. 나, 지금, 뭐한 거지? 황자를 그것도 다른 황자들 앞에서. 헐.

"어, 하이고, 죄송해요."

14황자님은 멋적은지 고개를 돌리셨고 다른 황자님도 날 의아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고향에 두고 온 동생 생각이 나서..."

아무렇게 둘러대는 나에게 14황자님은 재빨리 말하셨다.

"아, 괘... 괜찮아요. 해수... 누이?"

"누이?"

그의 말에 4황자님은 약간 비꼬듯 말을 던졌다. 14황자님은 웃으며 말했다.

"지켜봐 줘요. 내가 어떤 사내가 될지."

당연하지. 꼭 보고 싶은 걸. 말 안해도 난 다 볼꺼야. 나는 밝게 웃으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럼요. 황자님, 화이팅!"

"화... 화이..."

"팅!"

"팅. 화, 화이팅?"

주먹을 쥐고 해맑게 화이팅을 외치는 그를 보며 가슴 한쪽이 후련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두 황자님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이 없었다.

***

길거리

우리의 작은 '사고'가 수습된 후, 4황자님과 14황자님은 황궁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8황자님을 따라 사가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같이 가요! 아이 좀, 천천히 가시라구요!"

황자님이 어찌나 빨리 걸어가시던지 그는 그저 성큼성큼 걷고 있는데 나는 뛰어가야 했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멈추질 않으셨다.

"어? 화나셨어요? 왜요?"

보통 같으면 당장이라도 멈춰서 날 기다려 주실텐데...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행동에 나는 잠시 의아해 하다가 꾀병을 부리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봐 주시겠지?

"아고. 아고고고고.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못 걷겠네."

예상대로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작은 성공에 나는 미소를 띄고는 다리를 쥐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아까 그놈들 피해 달아나느라고 다리가 삔 줄도 몰랐네. 아우 얼마나 다친 거야? 한걸음도 못 걷겠네. 아이고-"

갑자기 그가 어느새 왔는지, 내 양쪽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날 걱정 가득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고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할 말을 잊어 잘게 흔들리는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먼저 긴 정적을 깼다.

"널 잃는 줄 알았다."

"네?"

날 잃어? 설마 아까전 일 때문에?

"널... 다시 보지 못하게 될까봐... 겁이 났단 말이다."

나는 말을 잃었다. 겁이... 났다고? 나 때문에? 순간, 그를 향한 나도 모를 감정이 북받혀 올라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황자님은 날 놓아주지 않으셨다. 잠시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황자님! 황자님!"

"아가씨!"

"어디 계십니까? 아, 저쪽이에요!"

그때 우리를 찾는 하인들이 몰려와 덕분에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겨죠? 십사황자님은요?"

"다 괜찮아."

채령이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언니와 연화 공주도 도착했다.

"수야."

"언니 걱정했죠? 죄송해요."

"병사들을 죄 풀었는데도 정이님도 너도 사라져 걱정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셨어요. 내일 입궁해서-"

연화 공주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황자님은 매몰차게 자리를 떠나버리셨다.

"오라버니!"

황자님께서 정말 많이 걱정하셨나보네. 그래, 그냥 걱정이야. 처아우를 향한 걱정.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아무리 내 자신을 세뇌시키려해도 가슴 한쪽에 씁쓸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

황궁

왕소

정이의 등은 온통 멍과 상처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변복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마도 잦았나 보다.

"변복까지 하고 나갔다 왔냐? 어머니가 아실까봐 이리 왔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외출이 잦나 보다. 그런 자들까지 알게 되고."

"어쩌다 보니 재수가 없던 거죠."

정이의 무심한 말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재수가 없어? 니 장난에 팔을 잃고 집안이 무너졌는데 재수가 없다고?"

난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떻게 수습할 건데?"

"거 몰랐다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게 아니라고요?!"

네가 말만 황자지 하는 짓은 아직 철부지 아이로구나. 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모르면 책임도 사라져? 넌 황자야. 자리가 높으면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거 몰라?"

"허, 우습네요. 언제부터 형님이 그렇게 웃전 노릇을 했다고. 아. 혹시 어머니께 혼자만 찬밥 대우라 이러세요? 아니면 어린 아우가 잘난 척 할까봐 아에 찍어 누르십니까?"

정이의 비꼼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만해라.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기어이 끝을 보았다.

"요 형님 말씀이 맞네요. 형님이랑 동복이란 말 듣는 게 창피합니다."

그말로 모든 대화가 끝이 났다. 나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가득 담아 정이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멍청한 놈..."

"형님..."

"너!"

갑자기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께서 날 세게 밀쳐 버리셨다.

"저리가!"

"어머니!"

정이가 놀라 말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벽장을 붙잡아 몸을 갸누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저 놈을 가까이 하지마. 정이 네가 위험해진다."

"어머니, 형님은 형님이 절 구해주셨습니다. 형님이 아니었음 제 팔이 잘릴 뻔 했는데-"

"속지마. 저 놈은 가까이 있는 자 모두를 불운하게 해."

덜컥,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원래 날 미워하셨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실제로 듣는 건 차원이 달랐다. 눈시울이 잘게 흔들렸다.

어머니는 정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했다. 정이 니 곁에 둬선 안돼. 가까이 해선 절대 안된다."

"어머니 그래도 형님이 절 구해주셨는..."

어머니는 몸을 돌려 날 쏘아보았다.

"니가 대답해. 정이와 멀리 지내겠다 하란 말이야. 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라심... 그렇게 하죠. 언제까지 품 안의 아이로 살래?"

마지막 말을 던지며 나는 정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

해수의 별채

해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일어난 일 때문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8황자님...

마음 속, 머릿 속이 그의 관한 생각으로 꽉 차서 복잡하였다. 그리고 이 감정... 이 느낌. 피하고 외면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더 이상 모른 척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아까 그가 잡았던 내 팔에 손이 갔다.

♤♡☆♧

사가 안 사당

왕소

탑 위에 돌 하나가 더 올라갔다. 나는 내가 쌓은 작은 소원탑 앞에 꿇어앉아 평평한 돌을 골라서 쌓았다.

-저리가! 저 놈을 가까이 하지마. 정이 네가 위험해진다.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돌 사이에 분홍빛 나비 머리꽂이를 끼웠다. 이런 건 믿지 않지만 오늘만은 믿고 싶다. 올라가는 돌맹이 하나하나에 나는 정성을 다해 빌었다.

언젠간... 언젠간 내게도 나만을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이 생기길...

***

이튿날, 황궁 정전

"넷째를 송악에서 살게 하자?"

정윤의 제안에 폐하께선 내게 눈길을 주며 말하였다.

"정윤 널 구해준 데 보답이냐?"

"곁에 두고 제 사람으로 삼을 욕심이 더 큼니다."

정윤에 말이 끝나자마자 지몽은 눈을 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폐하에게 끊켜버렸다.

"폐하, 사황자님의 별이 송악 머리 위에 떴는 걸 보았는데 이런 일이 생길려고 그랬나 봅니다. 사황자님의 별은 정윤님의 자미성과 그 합이-"

"니 애미가 정윤을 죽이려 했다."

나는 폐하의 무미건조한 말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니 친형은 정윤의 자리를 욕심내지."

"단 한 번도 뜻을 같이 한 적 없습니다."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도 이만하면 볼모로서 그만하지 않습니까?

"허면, 니가 처음 양자로 갔던 연유는 어쩔 테냐? 자식을 잃고 마음의 병을 얻은 강씨 부인을 위로코자 한 건데."

입 안이 메말랐다. 분명히 폐하께서 진실을 모를리가 없었다. 절대로.

"단 하루도 아들인적 없는 그저 볼모였습니다.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윤과 지몽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폐하께선 잠시 날 바라보시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윤의 곁에 어떤 자로 남을 테냐? 충주 유씨로 있을 거냐. 신주 강씨냐?"

내가 만약 유씨를 택한다면 나는 폐하께 또 다른 아들로서 정윤께 또 다른 아우로서 위협이 될 것이다. 허나 강씨를 택한다면 나는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폐하와 정윤의 신하로 살 겁니다. 아들도 아우도 아닌 오직 충성된 신하가 되겠습니다."

저는 황위에도 권력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폐하껜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침묵이 너무 길어 절망감이 피어오르던 그때,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지몽."

"예, 폐하."

"넷째의 별이 송악 위에 떴다고 했던가?"

"폐하와 정윤님의 별과 기막히게 어우러져 있지요. 사황자님께서 송악에 머무시면 고려 대웅에 전조가 될 겁니다."

"신주 강씨 일가와 온 송악에 그 사실을 알리라. 사황자 왕소, 오늘부터 송악에 거함을 허한다."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정말로 늘 꿈꾸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절을 올렸다. 이제부터 송악에 산다. 신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분명 기쁘다. 헌데 왜 가슴 한 쪽이 이리도 답답할까? 옥좌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

사가의 본채

해수

언니가 오랜만에 저녁에 날 보자고 하여 본채를 찾아갔다. 오늘 하루동안 8황자님과 마주치지 않게 일부러 피해다녔다. 본채에 왔는데도 보이질 않으니 아마 서가에 계신가?

"언니, 수입니다."

나는 언니의 방 밖에서 인기척을 낸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고 돌아섰는데 딱- 8황자님과 눈이 마주쳤다. 헐, 언니랑 같이 있었어? 그럼 언닌 우리 다 같이 밥 먹자고?

그대로 얼어붙은 내게 언니가 말했다.

"어서 와. 같이 석반을 들자고 불렀다."

"하, 전 그냥 제 방에서 먹어도 되는데요."

"종일 방에 틀어박혀선 그냥 밥상을 물렸잖니."

아 맞다. 그랬지. 오늘 통 밥맛이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가? 나는 황자님께 눈길을 주었다. 그는 날 보지 않고 그릇만 뚫어저라 쳐다보며 굳어 있었다.

"같이 먹으면 좀 났겠지 싶어 부른거다. 얼른 앉아."

어디로 갈 수 없이 앞뒤가 꽉 막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도중에도 그의 눈치만 살폈다.

"십사황자 때문이긴 했지만, 혼자 쫓아간 건 위험했다. 우리 황자님 아니셨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황자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황자님은 짧게 대답하셨다. 정말 그뿐인가요? 마음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요. 아직 그 마음이 무언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 뿐이죠.

"자꾸 밖으로 도니 그런 일을 겪는 거다. 통 집안일엔 관심이 없으니. 바느질이나... 베라도 좀 좋을텐데."

내가 그런 걸 알리가 없잖아.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라도 재미 붙일 걸 찾아볼게요."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때 내 옆에서 수저 놓는 소리가 나더니 황자님께서 일어나셨다.

"저 먼저 일어납니다."

나와 언니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읽을 서책이 좀 남아 있어서..."

그 말을 끝으로 황자님은 나가 버리셨다. 그가 문을 닫은 후에 나는 겨우 푹 숙인 고개를 들 수 이었다. 왠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

사가 안 사당

왕소

내일이면 황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곳에... 다시 올 일도 없겠지.

어젯밤 쌓아둔 돌탑 위에 나는 돌맹이를 하나 더 올렸다.

"또 부수는 거에요?!"

어느새 사당에 온 해수가 내게 뛰어왔다. 네겐 이게 부수는 것처럼 보이냐?

"부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나는 몸을 돌려 사당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런 날 그녀가 쫄래쫄래 강아지 마냥 따라와 조잘댔다.

"왠일. 무슨 소원 비셨는데요?"

"허, 이젠 남의 소원에까지 참견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동안 펼쳐진 고요한 정적을 내가 깼다.

"나, 이 집을 뜬다."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이미 날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나는 말을 이었다.

"황궁에 살기로 했거든. 이제 자주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갑자기 밀려오는 섭섭함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헌데 뱉고 나니 후회가 밀려와 다시 주워담고 싶은 마음이 태반이었다. 수는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나 그럼 이제 밥배달 안 다녀도 되겠네요. 잘됐다."

"허! 얼마나 다녔다고 생색은."

"황궁에선 제발 좀 무던하게 지내세요."

뭐라?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말 끝마다 죽이네 살리네 하지 마시고, 자기 말 안 듯는다고 눈에 힘 빡 주고 노려보지 마시고, 별거 아닌 일에 칼 꺼내는 거 그거 특히 조심하시고. 아, 남이 죽어라 만든 거 한 방에 부수지 마시고. 아, 또 뭐 있더라?"

"그만."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나는 눈을 부릅뜨곤 윽박을 질렀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내 표정은 곧바로 풀어졌다.

"밥 잘 먹고, 잠 잘 주무세요. 나쁜 꿈은... 될수록 꾸지 마시고."

진심이 담긴 그녀의 투명한 말에 나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방금... 날 생각해주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웃긴 일이었다. 어머니의 애정과 형제들과의 우애를 기대하며 이곳으로 돌아왔는데 진즉 날 위해주는 사람이 한 번도 본적 없는 계집이라니.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또 왜 그렇게 보는데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 넌 내가 무섭지 않다는게 생각나서. 어떻게 무서워하질 않냐?"

"전 제 자신이 제일 무섭습니다. 황자님이 아니라요."

조근조근 말을 잇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왜 널 무서워하지?

"내 마음인데도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이 안됩니다. 아무리 방향을 바꾸려고 해봐도 안되네요."

그녀는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별들은 이런 걱정도 안하겠지. 아하, 고려에 왔더니 별이 많긴 많다."

몸을 기울이며 별을 보는 그녀의 모양새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려라서 별이 많다니 설마 너 고려에만 별이 뜬다고 믿는거냐? 지몽이 알면 까무러치겠다."

그녀를 따라 나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하얀 눈이 부드럽기 우릴 감싸며 소복소복 쌓였다. 검은 밤하늘을 흰 눈이 다시 밝혔다.

"눈이다. 예쁘다."

보석처럼 흩뿌려진 별도, 꽃처럼 내리는 눈도 내 시선을 오래 끌지는 못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맑은 웃음을 지으며 읊조리는 해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올리곤 시야에 눈을 잡기라도 하듯 손을 내미는 그녀를 듬뿍 담았다. 그러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면 아닌 척 고개를 돌리고 그러면서도 자꾸 힐끔거리며 그녀에게로만 가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

이 책이 시작하고 처음으로 왕소로 시작하고 왕소로 끝나는 화입니다! 예!(환오성) 왕소는 이때부터 해수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었을까요? 은애는 아니어도 유일하게 자신을 보담아주는 사람이니 조금은 끌리겠죠? 서로간의 이해 정도? 화면이 아닌 글이니 주인공들의 생각, 감정 변화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를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내일이면 행복한 주말이니까 오늘 올릴 수 있었나봐요. 제 프로필 알림에 올라오는 댓글들과 투표한 별은 글 쓰는 제게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화의 제목은 '슬픈 이별, 후회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입니다. 모두들 손수건 준비해요. 😭😭

그리고 SBS 배스트커플상 투표하는 거 아시죠? 상은 소해커플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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