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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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여행이란, 발돋움대 같은 것이다.
그걸 도피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오히려 출발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출발한 그 곳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짐을 끌고 귀환하는 사람들 틈에 나도 경쾌한 발걸음으로 끼어든다.

접수하는 아가씨가 나를 보더니 여권을 달라고 한다. 상냥한 표정이다. 나는 여권대신 일련의 여행허가서를 심사대 위에 올려놓는데, 그 허가서는 세상 어느 곳이라도 들여보내 줄 수 있는 마법의 서류다. 아가씨는 서류의 사진을 보고 내 얼굴을 보더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당신..' 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좋아했던 활짝 핀 미소를 짓고 말한다.

"배낭여행 중이에요. 지금은 고향에 잠깐 들린거죠. 조용히 지나가고 싶은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가씨는 현명하게도 별 소란 없이 도장을 찍어준다. 상냥하고 고마운 아가씨다.
아가씨의 뒤에는 공항 경찰이,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나는 우선, 뭘 좀 먹기로 한다.
샌드위치를 먹고, 면세점에서 선물용 초콜릿도 좀 살 예정이다. 형형색색의 사람들 틈에 섞여, 점심 때의 혼잡한 공항 속을 걸어갔다. 그 사람들 틈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공항에서 공항점퍼가 특이한 패션이 아니듯, 검은 바람막이도 공항에선 그다지 수상쩍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산뜻한 봄인데도 긴팔과 긴바지로 온 몸을 감싼 내가 더 눈에 띄는 복장일테다.

그런데 샌드위치가게의 점원이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손님, 카드가 정지 되셨는데요?"
"네? 저기, 한번만 다시 해주세요."
점원은 내 뒤로 길게 선 줄을 힐끗 보더니, 카드를 한 번 더 긁었다. 그리고선 똑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붉어진 볼을 감싸려고 애쓰며 샌드위치가게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카드가 안될 수도 있지.'
나는 걸음을 옮기며 분을 삭혔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게 오히려 신기한거야. 어차피 내 것도 아니니까... 이참에 공항 구경도 하고, 오히려 잘됐네.'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마무리하고 나는 괜히 두리번 거렸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들 중 부모와 함께 나온 꼬마아이가 깔깔대며 뛰어노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언제나 귀여우므로,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화를 내면 될 일도 안된다고 했다. 애초에 내 노력으로 얻은 카드도 아닌데, 그걸 이유로 화를 낸다는 게 좀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들끓던 것이 가라앉은 후,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현금인출기가 눈에 띄었다. 봐! 금방 찾잖아! 나는 경쾌한 기분으로 인출기를 향해가느라 내 뒤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 시선이 내가 심사대를 통과할 때부터 나를 쫓고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몰랐다.

무지의 대가는 몇 십초 뒤 손수건에 흠뻑 젹셔진 마취제로 돌아왔다.

오전 11시 40분, 비행기가 착륙했다. 비행기엔 국제 프리패스를 가진 버드가 타고 있었다.
버드는 CCTV에 찍혔다. 기록된 영상에 따르면, 버드는 입국 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했으며, 직후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갔다. 오전 12시 03분, 버드가 쫓겨났다. 버드는 근처의 현금인출기로 향했는데, 이 역시 CCTV에 찍혔다. 기록된 영상에 따르면, 범인들은 버드를 따라 부스형 인출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흡입 마취제를 사용해 버드를 기절시켰다. 현금인출기 주변의 인적이 드물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람 한 명을 빼돌리는 것도 쉬웠을 거라는 추측이 다수이다.

버드의 프리패스를 발급해준 사람이자, 변호사이자, 그의 대리인이고, 문제의 카드를 일시정지시킨 장본인은 버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늘을 나는 꿈 Flying Dream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