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1번째 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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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 앉았다.

해가 내려간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달빛조차 비추지 못하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인간이 닿지 못한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동굴 안에는 불쾌한 기운이 느껴져서 더욱 어두워 보였다.

한참을 기다리던 생명체는 그 동굴 안에서 눈을 떳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에 곧게 뻗은 뿔이 돋아 있었다.

원래는 뿔이 두 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반대쪽 머리에는 잘려나간 뿔이 어렴풋이 보였다.

생명체는 동굴 바닥에 늘어뜨려 놓았던 검은 날개를 펼쳤다.

뜨득.

뼈가 마찰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개가 과감하게 펼쳐졌다.

"크윽"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날개가 굳어있었는지 힘겹게 펼친 날개를 도로 접었다.

날개를 제외하면 멀쩡한 육체라는 것을 확인한 생명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잘려나간 뿔이 아쉬웠던 건지 머리를 더듬으며 키득거리던 생명체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남긴 흔적이야 이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생명체는 즐겁다는 듯이 웃어댔다.

"크큭, 내 뿔을 가져갔으니 나도 너에게 소중한 것을 하나만 가져갈게 그래야만 공평해지잖아?"

한참을 미친 듯이 웃어 대던 존재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엘루시아, 이번에야말로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이리나를 가져가고야 말겠어!"

곧 검은 날개를 펼친 생명체 아니 '악마'는 송곳니를 붉은 혀로 핥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거야 이리나 그 사실은 네가 죽어서도 바뀌지 않을 거야 ,인간일 수 밖에 없는 너는 연약하고 더러운 존재니까"

"크하하하"

동굴 안에는 오랫동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

'또...죽었나?'

'이번에는 조금 아쉽네...'

'뭐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니'

'미련은 없다.'

'이번이.. 10번째인가?'

그녀는 어두운 공간의 느낌을 만끽하며 누워있었다.

여러가지 생을 살며 유일하게 그녀가 평안을 느낀 시기는 바로 삶과 삶의 사이에 있는 의식의 공간을 떠돌 때였다.

이 공간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매우 한정적이었지만 그녀에겐 그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하, 이 짓도 정말인지 질리는군'

피식 웃으며 그녀를 감싼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눈 앞에 빛이 보였다.

11번째 삶에 왕녀가 되었다.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